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국 사회는 큰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 한국 불교 역시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수행과 철학을 넘어 사회·민족·현대성이라는 시대정신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 경허(鏡虛)와 그의 법맥을 이은 근대 불교 운동가들(만해 한용운 등)이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경허의 간화선 부흥과, 근대불교가 맞이한 새로운 시대정신의 흐름을 비교하며, 불교의 민족화·현대화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봅니다.
경허: 간화선의 부흥과 선종의 재생
경허(鏡虛, 1849~1912)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사로, 불교 쇠퇴기의 한국 선종을 부흥시킨 인물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 중심 정책과 숭유억불로 인해 불교가 정치·사회적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였고, 사찰 역시 제 기능을 상실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경허는 이 같은 상황에서 선종의 원형 복원과 간화선의 재활성화에 힘썼습니다.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의심(疑情)을 지속하며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으로, 고려 지눌 이후 명맥이 약해지던 수행 전통이었습니다. 그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수행자들에게 내면의 근본을 바라볼 것을 강조했으며, 말과 글, 교리 너머에서 참된 자아를 찾는 선문답을 전통적으로 계승·복원했습니다.
경허는 또한 참선의 대중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산중에만 머물지 않고 세속에서도 수행할 수 있음을 주장했고, 선 수행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을 위한 깨달음의 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지도자로서 만공, 한용운, 수월, 혜월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고, 이들에 의해 경허의 간화선은 20세기에도 살아남아 현대 한국 불교의 핵심 수행 전통이 됩니다.
한용운과 근대불교: 민족의식과 불교 정신의 결합
한용운(1879~1944)은 경허의 제자로, 조선 불교를 민족운동과 연결시킨 근대불교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문학가, 사상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불교가 조선의 미래를 위한 정신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승려로 참여한 그는,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통해 조선 불교의 개혁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불교의 본질은 깨어있는 인간 의식과 자주성에 있으며, 권위적 사찰 체계나 타성적 의식 구조에서 벗어나야 함을 역설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는 "나는 민족보다 종교를 위에 두지 않는다"입니다. 이는 불교가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민족을 위한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타냅니다. 불교는 고립된 수도원 안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현실과 시대정신에 응답하는 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님의 침묵』 등 문학 작품을 통해 불교의 감성과 자아 탐색 정신을 대중적으로 전달했습니다. 이는 불교가 철학이나 교리뿐 아니라 문학·예술·정신문화 전반에 스며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간화선과 시대정신의 만남: 수행에서 민족으로
경허와 한용운은 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지만, 각자의 시대적 역할은 매우 달랐습니다. 경허는 조선 후기의 폐쇄된 불교계에 수행 정신을 되살리고 종단을 정화했다면, 한용운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불교를 민족과 시대정신의 중심 철학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모두 불교가 시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상이어야 한다고 본 점입니다.
- 경허는 “산중선에서 생활선으로”
- 한용운은 “개인구제에서 민족자각으로”
불교의 역할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경허의 간화선 수행법은 한용운에게 내면의 독립정신과 자각의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수행의 궁극은 자아의 해탈이지만, 이 자아는 사회적 실천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한용운은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불교가 고요한 깨달음에서 깨어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흐름은 훗날 운허 스님, 법정 스님, 성철 스님 등에도 이어지며, 근현대 불교의 실천적 지성으로 확장됩니다.
경허는 침체된 조선 불교에 간화선이라는 수행의 맥을 다시 살려냈고, 한용운은 그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과 근대, 자각과 해방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었습니다. 이 둘을 통해 우리는 불교가 시대에 따라 수행에서 철학, 철학에서 실천으로 확장된 흐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이렇게 수행 중심 종교에서 민족의식과 현실 참여를 품은 종교로 발전해왔습니다. 오늘날 불교가 나아갈 방향 역시, 경허와 한용운이 보여준 내면의 자각과 외면의 실천이 통합된 길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