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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 계보로 보는 동아시아 불교의 흐름

by notion7483 2025. 6. 19.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고 뿌리내릴 수 있었던 핵심 배경 중 하나는 '불경 번역'이라는 거대한 작업 덕분입니다.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로 전해지던 교리와 경전들이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의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 중심에는 구마라습, 현장, 의정이라는 세 번역가의 계보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불교 번역사의 흐름과 사상적 기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구마라습: 번역 불교의 선구자

불교 경전과 염주

구마라습(344~413, 鳩摩羅什)은 인도계 쿠차 왕국 출신의 불교 승려이자,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번역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4세기 말 중국으로 건너와, 장안에서 불경 번역에 몰두하며 약 300여 권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습니다. 그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전환을 넘어, 당시 중국인들의 사상과 문화에 맞게 불교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듬은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중론』, 『백론』, 『금강반야경』 등은 중관사상(공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중국 불교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구마라습의 번역은 철저한 교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후대 불교사상가들의 교리 정립에 뼈대를 제공했습니다. 문체 또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워,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구마라습은 단순한 번역가를 넘어, 동아시아 불교 교학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장: 체계적 번역의 정수

구마라습 이후 약 200년이 흐른 7세기, 당나라 시대에 등장한 현장(玄奘, 602~664)은 불경 번역의 체계와 정밀함을 한층 더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그는 인도에서 원전 불경을 직접 수집하기 위해 당 태종의 허락 없이 무단 출국했고, 무려 17년간 천축(인도)을 순례하며 657부의 경전을 모았습니다.

귀국 후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대안사에서 수십 명의 학자들과 함께 불경 번역에 착수한 그는, 1335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불경을 번역했습니다. 대표작은 『유식삼십송』, 『성유식론』, 『대지도론』 등이 있으며, 이들을 통해 유식학(唯識學)의 철학을 동아시아에 정착시켰습니다.

현장의 번역은 구마라습과 달리 원문에 충실하고 직역에 가까운 특징이 있으며, 음역어 사용이 증가하고 해석적 설명도 첨가됩니다. 이런 방식은 학문적 정밀성은 높였지만, 난해하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불교 번역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고, 중국 불교 사상에서 유식학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정: 남방불교 전통과 계율 중심의 번역가

현장의 뒤를 이은 또 하나의 중요 인물은 의정(義淨, 635~713)입니다. 그는 남중국 해상을 통해 인도로 건너간 승려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불교 중심지를 탐방하며 25년간 불교 의례, 계율, 문화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계율과 실천 중심'의 불경 번역에 있었습니다. 구마라습이 교리 중심, 현장이 철학 중심의 번역이었다면, 의정은 실천적 불교의 바탕이 되는 율장(계율)에 집중한 것입니다. 『남해기귀내법전』,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등의 저작은 단순한 번역을 넘어 당시 불교 문화와 수행방식을 생생히 전달한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그는 남방불교 전통에서 중시하는 미륵 신앙, 보시와 계율 실천, 스님들의 일상생활 등 현실적 불교생활을 철저히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점은 이후 동아시아 민중불교, 특히 고려시대의 불교 실천 사상과 율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구마라습, 현장, 의정은 각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불경 번역을 실천했습니다. 구마라습은 중국 문화에 맞춘 번역과 중관사상을 퍼뜨렸고, 현장은 철저히 원전 중심으로 유식학의 철학을 심었으며, 의정은 실천과 계율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의 생활화를 도왔습니다. 이 세 인물을 통해 동아시아 불교는 경전의 언어 장벽을 넘어, 문화와 사상을 융합한 독자적 불교로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불교의 뿌리를 알고 싶은 이라면, 이들의 번역 작업부터 다시 읽어보는 것이 깊은 이해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