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습은 단지 불경을 한역한 번역가가 아닙니다. 그는 중관사상을 동아시아에 전한 사상적 선구자이며, 이후 수많은 고승과 철학자들이 그의 사유를 확장하며 불교 철학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구마라습 이후 중관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승조, 이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원효, 실천 중심 사상을 체계화한 지눌 등 대표 고승들의 계보를 따라가며, 불교가 어떻게 ‘번역된 경전’에서 ‘삶의 철학’으로 자리 잡아갔는지를 살펴봅니다.
중관사상: 구마라습과 승조의 철학적 연결
구마라습이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번역·보급한 사상은 바로 ‘중관(中觀)’입니다. 이는 인도의 대승불교 철학자 용수(龍樹)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며, 모든 존재는 본질이 없고 공(空)하다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구마라습은 『중론』과 『백론』 등의 경전을 통해 이 사상을 중국에 소개했고,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과 사유의 전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제자인 승조(僧肇, 384~414)는 중관사상을 본격적으로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입니다. 『물불론(物不遷論)』, 『불진론』 등의 저술에서 ‘존재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불이(不二)의 개념, 현상과 본질의 구분에 대한 통찰, ‘즉공즉유(卽空卽有)’의 관점을 통해 중관사상을 중국적 철학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승조는 이론적 명료함과 직관적 통찰을 겸비한 글로 중국 불교 사상의 철학적 깊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선종이 뿌리내릴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화쟁철학: 원효의 통합적 사유
중관사상은 단일 체계로만 머물지 않고, 한국에서 보다 융합적이고 실천적인 철학으로 진화합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원효(元曉, 617~686)입니다. 그는 삼국시대 후기의 대표적 고승으로, 당시 분파적으로 나뉜 불교 교리들을 하나의 틀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펼쳤습니다.
원효는 『십문화쟁론』, 『기신론소』 등의 저작을 통해, 중관과 유식이라는 상반된 이론을 조화시켜 하나의 진리로 귀결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그가 주창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의 핵심입니다. '화(和)'는 화합, '쟁(諍)'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그는 논쟁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의 합리적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또한 원효는 불교 철학을 단지 이론에 그치지 않고 대중이 실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무애가』 등 대중 설법 활동과 함께, 스스로 거리로 나가 민중과 함께 수행하는 실천불교를 실현했습니다. 이처럼 원효는 구마라습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그 철학을 한국인의 현실과 문화 속에서 녹여내며 새로운 불교철학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실천불교의 완성: 지눌과 정혜쌍수
불교가 동아시아에 뿌리내리며 철학적 정립 단계를 넘어 실천 중심으로 확장되는 흐름은 고려시대 지눌(知訥, 1158~1210)에게서 정점을 이룹니다. 지눌은 구마라습으로부터 시작된 중관사상과 선종의 실천법을 통합하여, 한국 불교를 교리와 수행이 균형을 이루는 체계로 재구성했습니다.
그의 대표 사상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정혜쌍수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조화로운 수행을 뜻하며, 돈오점수는 ‘문득 깨치고 서서히 닦는다’는 수행 이론입니다. 이는 이론적 깨달음과 실천의 균형을 중시하며, 형식적인 교학 불교를 넘어서 체험 중심의 불교로 이끄는 사상입니다.
지눌은 『보조법어』, 『간화결의론』 등에서 선과 교, 깨달음과 실천의 조화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이후 조계종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조선불교, 나아가 현대 간화선 불교로까지 이어지며,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 쉬는 한국불교의 핵심 정체성입니다.
구마라습에서 시작된 불교 철학의 여정은, 승조를 통해 논리적 철학 체계로 정립되고, 원효를 통해 사상 간 융합과 실천적 통찰로 확장되며, 지눌에 이르러 수행 중심의 체계로 완성됩니다. 이 계보를 따라가 보면, 단지 불경을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삶 속의 철학’으로 불교가 진화해온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구마라습의 영향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 깊이 있는 탐구를 원한다면, 각 인물의 저서를 직접 읽고 그들의 사유에 접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