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존에 진행하던 ‘중국과 한국 고승 비교 시리즈’에서 일부 교리적 흐름이 단절되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 철학의 전개 과정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순서를 재구성하였습니다. 본 글에서는 석가모니 이후 인도에서 발전한 주요 사상들과 고승들의 활동을 먼저 살펴보고, 이후 중국과 한국의 불교 철학자들과의 연결성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불교의 흐름을 보다 입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깨달음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약 500년 동안 인도 내에서 철학적으로 체계화되고,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시기 수많은 고승들이 등장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아난과 가섭을 중심으로 한 초기 결집, 그리고 나가르주나(용수보살), 무착(아상가), 세친(바사밧티) 등은 불교 교리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 결집과 교단 정립의 중심: 가섭과 아난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 첫 번째 결집을 열었습니다. 이 결집의 핵심 인물은 대가섭(Mahākāśyapa)과 아난(Ānanda)이었습니다. 가섭은 엄격한 수행자이자 승단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로, 계율을 정비하고 스승의 전통을 체계화한 장본인입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승단은 안정된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아난은 석가모니의 사촌이자 시중을 들던 제자로, 석가모니가 설한 수많은 법문을 기억하고 있던 인물입니다. 그는 “내가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하는 경전의 서문을 남긴 인물로, 초기 경전의 전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전달한 설법은 후대에 《아함경》으로 정리되며 초기 불교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초기 결집은 단순히 기록 차원을 넘어서, 불교가 조직 종교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는 후대 고승들이 철학적 정립에 착수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며, 아난과 가섭의 역할은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초로 작용합니다.
중도와 공 사상의 철학자: 나가르주나(용수보살)
2~3세기경 인도에 등장한 나가르주나(Nāgārjuna)는 대승불교의 철학적 초석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기존의 교학적 체계를 뛰어넘어 ‘공(空, Śūnyatā)’ 개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철학, 즉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창시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연기(緣起)’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면서, 존재의 본질을 ‘공’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공’이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니라, 고정적이고 자성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깨달음의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핵심 저서인 《중론》(Mūlamadhyamakakārikā)은 이후 대승불교 철학의 근간이 되었으며, 중국의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에서도 이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나가르주나는 ‘이중진리설’을 제시했습니다. 즉, 세속의 진리(속제, 世俗諦)와 궁극의 진리(진제, 第一義諦)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를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 관점은 불교가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철학적으로 깊은 메시지를 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중관은 실재와 인식의 경계를 허물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대표 철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음 중심 불교의 체계화: 무착과 세친
나가르주나 이후, 대승불교는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바로 ‘유식학(唯識學)’입니다. 이 사상을 정립한 인물들이 바로 무착(Asaṅga)과 그의 동생 세친(Vasubandhu)입니다. 유식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상으로, 인간의 인식 구조를 통해 세계를 해석합니다.
무착은 ‘법상종(法相宗)’의 시조로 불리며, 《유가사지론》 등에서 현실과 인식의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팔식(八識)’ 이론을 통해 인간의 인식 작용을 분석했으며, 그 중에서도 ‘아뢰야식’은 개인의 업(業)과 무의식적 요소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세친은 《구사론》과 《유식삼십송》 등의 저작을 통해 유식학의 이론을 체계화했으며,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식학은 중관의 '공' 개념을 보완하는 인식론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중관이 존재의 본질에 대한 논리라면, 유식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 집중합니다. 이 두 사상은 중국에서 나란히 발전하게 되며,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여러 교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원효와 의상 같은 한국 고승들은 이 두 사상을 조화롭게 해석하며 ‘화쟁(和諍)’과 같은 융합적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결론: 철학의 뿌리는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자비와 지혜에서 출발했지만, 그 이후 수백 년간 인도 내 고승들의 철학적 활동을 통해 체계화되었습니다. 아난과 가섭은 가르침을 전승하고 교단을 정비했으며, 나가르주나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해 불교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무착과 세친은 인간의 인식 작용을 바탕으로 불교를 하나의 정교한 사유 체계로 정립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중국과 한국으로 전해지며, 각 지역의 고승들에 의해 다시 해석되고 실천의 철학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불교는 단순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와 존재, 인식과 실천을 통합하는 철학이자 삶의 지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인도에서 정립된 이 철학이 어떻게 중국에서 제도화되고 교학적으로 정착되었는지를, 구마라습, 현장, 지의, 달마 등의 고승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