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지눌은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라는 수행 원리를 통해 한국 불교의 실천 철학을 정립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불교는 더 이상 일부 수행자나 지식인 중심에서 머무르지 않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실천 중심 신앙, 율장 강조, 미륵신앙, 사회운동으로서의 불교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눌 이후 한국 불교가 어떻게 민중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등장한 대표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진표와 율장 중심 불교: 실천의 시작
고려 이전, 통일신라 시대 말기에는 민중 속에서 불교를 재조명한 인물로 진표(眞表, 8세기 활동)가 있습니다. 진표는 귀족 중심의 화려한 교학 불교보다는, 철저한 계율과 수행을 통한 미륵불의 현세구제를 강조한 고승입니다. 그는 특히 계율을 중시하며, 불교가 형식과 이론에 치우친 것에 대해 반성하고 대중적 신앙 실천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진표는 백률사, 금산사 등에서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신앙운동을 전개하였고, 삼천배, 참회, 보시, 청정생활 같은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 혼란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찾던 민중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그의 율종 계보는 고려 시대에도 큰 영향력을 이어갔습니다.
진표의 불교는 단순한 계율 강요가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 구제가 결합된 형태였고, 이는 후대 조계종과 선종에서도 계율과 실천의 균형을 추구하는 흐름에 중요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미륵신앙과 민중불교의 확산
지눌 이후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까지, 불교는 점차 민중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흐름 중 하나가 미륵신앙입니다. 미륵은 미래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로, 현세적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미륵신앙은 각지에서 유행했으며, 보우(普愚, 1301~1382) 같은 고승들이 이를 교리와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또 함허득통, 태고보우 등은 선종의 정통을 잇는 동시에 민중 신앙의 필요성을 수용하며, 교리와 신앙이 분리되지 않는 형태로 불교를 이끌었습니다.
미륵신앙은 절에서의 의례뿐 아니라, 마을 단위 미륵당, 민속신앙과의 결합, 불교무속적 요소를 포함하며 널리 퍼졌습니다. 이는 민중이 불교를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하고 실천하게 만든 결정적 전환이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시대 억불정책 하에서도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근대 불교와 한용운: 수행에서 사회로
조선 말기부터 근대로 넘어오면서, 한국 불교는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듭니다. 한용운(1879~1944)은 수행자이자 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불교를 민중 속의 철학이자 사회운동으로 확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을 통해 불교적 사랑과 공(空)의 철학을 현대 문학으로 승화시켰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한용운은 간화선 부흥 운동을 통해 근대 한국불교의 수행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조선시대 동안 쇠퇴한 불교를 다시 수행 중심으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이는 그의 스승 경허와 함께 시작된 운동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진정한 민중불교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이자 참여였습니다.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며, 불교가 단지 수행의 종교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응답하는 종교임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이처럼 한용운은 민중 속으로 들어간 불교의 흐름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실천한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눌이 정립한 정혜쌍수는 단지 교단 내부의 수행 원리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진표의 율장 중심 불교는 민중 속 실천의 출발점이 되었고, 미륵신앙은 고난 속에서 희망을 찾는 민중의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한용운은 근대의 사회 속에서 불교를 시대와 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불교는 이렇게 사찰과 승단을 넘어 삶과 현실에 뿌리내린 실천 종교로 진화해 왔습니다. 지금의 한국불교도 이 흐름 위에 서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체험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