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는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본격적으로 전해지고,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다. 특히 이 시기 중국의 고승 도안(道安)은 교단 정비와 율장 해석을 통해 중국 불교의 기초를 마련했고, 고구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며 국가 종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본 글에서는 도안의 활동과 고구려 불교 수용 과정을 비교하며, 초기 동아시아 불교의 공통된 흐름과 특징을 살펴본다.
도안의 교단 조직과 중국 불교의 시작
도안(312~385)은 중국 동진 시대의 대표 고승으로, 중국 불교가 자생적 철학과 조직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당시 중국 불교는 외래 사상으로만 인식되었고, 다양한 번역 경전으로 인해 교리 혼란이 있었다. 도안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리 정리와 승단 통일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먼저 율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출가자들의 생활 기준을 명확히 하였다. 이전까지는 승단 내 계율이 통일되지 않아 지역마다 다른 불교 실천이 존재했지만, 도안은 이를 통합하여 중국식 교단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특히 그는 ‘삼천위의(三千威儀)’를 바탕으로 수행자의 자세와 실천 기준을 재정비했다.
또한 도안은 경전 번역 작업에도 참여하며 불교 용어의 표준화를 시도했다. 당시 다양한 번역자들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던 혼란을 해소하고자, 그는 번역 경전 목록인 《중경록(衆經錄)》을 편찬했다. 이를 통해 그는 불교의 학문적 정립과 체계화에 큰 공헌을 하였고, 후대 구마라습과 현장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 불교의 전래와 수용
중국에서 불교가 제도화되던 시기, 한반도 고구려에도 불교가 전래된다. 공식적으로는 372년 전진(前秦)의 부견이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파견함으로써 불교가 수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수림왕은 즉시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채택하고, 수도에 사찰을 짓고 불상과 불경을 받아들였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교류를 넘어, 왕권 강화를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불교를 적극 활용한 사례이다. 불교는 고구려 귀족 사회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국가 행사와 정치 의례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고구려 초기 불교는 중국 북방의 불교 전통, 특히 율장 중심의 실천 불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는 도안이 강조한 율장 정비와도 통하는 부분으로, 중국과 고구려는 같은 시대에 불교를 제도화하고 국가화하는 흐름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고구려 간 불교의 교류와 공통 흐름
도안과 고구려 불교의 전개 양상을 비교하면, 당시 동아시아 불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첫째, 불교의 제도화다. 도안은 승단의 내부 질서를 정비했고, 고구려는 국가 단위로 불교를 수용하여 정치와 결합시켰다. 둘 다 불교를 생활과 정치의 중심 철학으로 끌어올린 점에서 의미가 크다.
둘째, 율장의 중요성이다. 도안은 계율을 바탕으로 교단을 통일했고, 고구려 또한 초기에는 엄격한 계율 중심의 실천 불교가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불교가 철학 이전에 삶의 실천과 윤리 체계로 기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교리 정비와 용어 통일 노력이다. 도안이 경전 용어를 정리하고 번역을 표준화하려 했듯, 고구려도 중국에서 전해진 경전들을 체계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백제와 신라의 불교 수용에도 영향을 준다.
4세기 중국과 고구려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각자의 문화와 정치 구조에 맞게 불교를 정착시키기 시작한 시기다. 도안은 교단과 철학을 정리하며 중국 불교의 초석을 닦았고, 고구려는 불교를 정치 이념과 결합해 빠르게 확산시켰다.
이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있었지만, 불교를 ‘현실에 맞게 구조화’하려는 동일한 흐름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제도화와 실천 중심의 불교는 이후 동아시아 불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으며, 향후 일본과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5~6세기 달마대사와 혜량을 중심으로, 선종의 시작과 동아시아에서의 실천불교 확산 과정을 살펴본다.